미국성공회의 의장주교 케서린
제퍼츠 쇼리의 저서 <Gathering at
God’s Table: The Meaning of Mission in the Feast of Faith>(이하
Gathering at God’s Table)를 소개하기에
앞서 지난 7월 5일부터 12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제77차 미국성공회 전국의회을 언급하고자
한다. 쇼리 주교가
자신의 저서에서 소개하는 “다섯 가지 선교 지표”(Five Marks of Mission)의 실질적
결과물이 전국의회에서 나타난 까닭이다.
혹자는 이번 전국의회에서 통과된 동성간 시민결합에 대한 축복 예식과 트랜스젠더의 사제 서품 등에 관해 미국성공회가 세계성공회의 분열을 초래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성공회의 향후 3년간(2013년-15년)의 활동이 반영된 예산안을 살펴보자. 이번 예산안은 세계성공회 협의회(Anglican Consultative Council)에서 1986년부터 1990년까지 전개한 “다섯 가지 선교 지표”을 바탕으로 짜여졌다. 다시 말해, 미국성공회가 세계성공회의 선교에 대한 신학적 지표를 어느 교회보다 적극적으로 따르고 있음을 증명한다. 예수께서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고 하신 말씀을 고려할 때 선교가 미국성공회의 마음 한가운데 있다고 해석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미국성공회의 이런 움직임은 선교에 올인한 교회를 향한 연대의 발걸음이며 아직 망설이고 있는 교회에겐 초대의 손길이다.
“다섯 가지
선교 지표”를
기준으로 계획된 이번 예산안과 관련해
주목할 점이 한가지 더 있다. 바로 전국의회에서 채택된 이
예산안이 지난 6월 21일 쇼리 주교가 제출한
예산안을 근거로 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의장주교가 예산안을 직접
제출한 것은 이례적인데, 그만큼
쇼리 주교의 선교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음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수천만달러의 액수가 반영되는
쇼리 주교의 예산안은 손익을 따지는
단순한 회계 보고서가 아니라 “다섯 가지 선교 지표”를 따라 숫자로 쓴
선교 보고서인 셈이다.
그렇다면 쇼리 주교가
<Gathering at God’s Table>에서 주요
논제로 다룬 “다섯
가지 선교 지표”는
무엇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다섯 가지 선교 지표”는 세계성공회 협의회가 선교에
관해4년 동안
연구한 열매다. 이는
1999년, 세계성공회
선교와 복음화 위원회(MISSIO)가
저마다 다른 지역 교회의 상황을
숙고해 재조명했다:
-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 새신자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며 양육하기
- 이웃의 필요에 사랑으로 섬기며 응답하기
- 불의한 사회 구조 변혁하기
- 창조 질서의 보전과 지구의 생명을 지키고 새롭게 하도록 노력하기
<Gathering at God’s Table>은
다섯 가지 선교 지표에 따라
모두 다섯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쇼리 주교는 각 장마다
자신의 신학적 성찰을 나누며 선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다. 또한 각 꼭지마다 다섯
가지 선교 지표를 따라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데 개인과 교회가 반드시 성찰해야
할 부분이다.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
쇼리 주교는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된 참세상에 관한 하느님의
오랜 꿈을 나누는 것”이 곧 하느님나라의 복음
선포라고 말한다. 그래서
참된 복음 선포는 “하느님과
이웃과 온 세상이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사는 것”을
포함한다. 하느님이 꿈꾸는
세상, 하느님나라에선 아픈
이들이 보살핌과 치유를 받고
그 누구도 배고프거나 전쟁에 몰두하지
않으며 모두가 평화와 정의 가운데
함께 살아간다. 이것은
환대(hospitality)의 영성이며,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
샬롬의 길을 보여주신다.
이러한 쇼리 주교의 복음
선포에 대한 이해는 개종(proselytization)의 개념을 넘어선다. 말로만 하는 복음 선포가
아니라 행함이 함께 수반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한
하느님의 통치의 표지와 맛보기와 도구로서
선교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새신자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며 양육하라
선교의 두 번째 지표인
새신자 교육과 세례와 양육은 “샬롬의 세상을 함께 구축하고
이웃을 올바른 관계로 초대하는 예수의
제자를 길러내는 일”이다. 여기서
새신자 교육이란 단순히 교리를
주입하는 게 아니다. 신자
자신이 “하느님의 현존을
내 안과 밖에서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신앙
공동체는 신자들이 성사적(sacramental) 시각으로 평범한 일상
속 살아계신 하느님의 신비를
더욱 깊이 바라볼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신비를 향한
여정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신앙의 여정 가운데 있다. 이 여정을 가는데 있어
새로운 공동체와 리더가 절실히
필요하다. 쇼리 주교는
세례에서 리더십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세례는 “새
창조이자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참예함으로 그리스도의 빛에
초대받고 이 빛이 필요한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웃의
필요에 사랑으로 섬기며 응답하라
오랫동안 “자선사업”(corporal works of mercy)으로 불린
세 번째 선교의 지표는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웃 사랑이다. 쇼리 주교는 이웃 사랑이란
“길가에 쓰러져 자비의
손길이 필요한 이를 고귀한 인간으로
인식한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예수께서 직접
행하신 먹이고 치유하는 일에 동참하면서
우리 주위에 현존하는 고통에 대한
응답”한다.
쇼리 주교는 “당신이
속한 공동체가 부정한 의료
시스템과 조직적 불의, 그리고
폭력 간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이
질문을 몸소 해결하려는 이들은 하느님께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만을 간구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이
쓰러진 이웃에게 몸소 하느님의
자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한다. “주여, 우리가
이웃에게 당신의 자비가 되게 하소서!”
불의한 사회 구조를 변혁하라
사회변혁을 위한 네
번째 선교의 지표는 “예언자적이고
정치적”이다.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마태오 21:12),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라는 비유(마르코 12:17), 과부의
헌금(루가 21:1-4), 포도원 일꾼과 품삯(마태오 20)의
성서 본문을 살펴보자. 예수의
사역은 정치와 종교을 나눠 어느
한 곳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 정치를 비롯해 종교, 경제가 교차되는 삶의 한
복판에서 일어났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정치성을
지닌 네번 째 선교 지표를
“세속적”이거나
종교인들에게 “너무 위험한
일”로 간주한다. 보수화 경향이 짙어지고 있는
한국의 상황 또한 예외가 아니다. 쇼리 주교는 이런 시각에
대해 “평화와 정의의
구현이 그리스도교 선교의 근본을
이룬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절망, 무관심, 증오, 가난, 두려움, 기아라는
악을 몰아내고 병폐로 가득한
세상을 치유하도록 권한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공동체를 비롯해 국가와 세계를 위협하는
불의는 무엇인가.
창조
질서의 보전과 지구의 생명을
지키고 새롭게 하도록 노력하라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는 창세기 1장 28절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자연 지배와
파괴를 정당화시켰다. 또
“정복”(dominion)이란
단어를 소유나 사사로운 목적을 성취하라는
뜻으로 곡해했다. 쇼리
주교는 다섯 번째 선교의 지표가
오랫동안 등한시된 부분이라고 지적하며
“정복”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집을 뜻하는 라틴어
“도무스”(domus)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지구의 정복자(혹은 파괴자)가
아니라 지구라는 집의 거주자(household)로서 이 집의
살림살이(housekeeping)를 책임져야
한다.
선교의
하느님, 하느님의
선교
지금까지 쇼리 주교가
자신의 저서 <Gathering at God’s
Table>에서 주요 논제로 다룬
“다섯 가지 선교
지표”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세계성공회가 이해하는
선교는 단순한 포교나 개종에 국한되지
않는다. 선교는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는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관한 실천적 응답이다.
쇼리 주교는 책의 서문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
존재한다.” 즉, 선교란 하느님의 교회가 부수적으로
해야 할 목록 중의 하나가
아니다. 바로 “선교의 하느님”이
당신의 선교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하느님의 사랑이
감춰진 곳으로 보내신다.

윤 예비신부님, 옛 뉴조기자님 ㅠㅠ 수고하셨어요. 좋은 글입니다.
답글삭제안녕하세요. 저는 대한성공회의 최돈순 신부입니다.
답글삭제성공회 선교의 다섯가지 표지에 관한 윤신부님의 글을 읽고 이렇게 댓글을 올립니다.
혹시 실례되는 부탁을 드려도 될지 몰라 조심스럽습니다만, 제가 아직 쇼리주교님의 책을 읽지 못했고 한국어판이 번역이 안된 것으로 알아 부탁드려봅니다. 제가 블로그에 올리신 번역문을 사용해서 글에 인용해도 될지 여쭤보고 부탁드려봅니다.
글의 사용처는 디아코니아와 선교에 관한 간단한 발제인데 금전적 수익이나 학위에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만 다른 이들과 생각을 나눠보는 자리라 허락을 받았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시는 분께 불쑥 연락을 드려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이 댓글을 보시면 donsoonpaul@gmail.com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